구강악안면외과 영역의 질환에 대한 기록은 오래 전 이집트시대(Ebers Papyrus, B.C. 1500년경)에 치은농양 등에 관한 것이 처음인 것으로 사료된다. 그리스 시대에도 Hippocrates(B. C. 460∼377)가 악골골절의 고정법, 악관절탈구의 정복법이나 발치법 등 구강악안면외과 관계의 치료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고 점차 외과영역의 학문적 체계를 구축하였다. 로마시대에 있어서도 의학, 특히 외과분야에 있어서 Celsus(B. C.30-A. D.50)는 구순열의 수술, 악골골절의 치료법이나 치아의 재식, 구강점막의 아프타성 궤양 등을, Galenos(A. D. 129 ∼ 201)는 치통이나 구강궤양 등에 대하여 외과적으로 기술하고있다.
 

이와 같이 구강악안면외과는 외과의 한 분야로서 발달했으며 그후 16세기경 프랑스의 외과의사인 Ambroise Pare(1517∼1592)가 구순열의 수술, 외상이나 매독에 의한 구개천공에 대한 전색자의(栓塞子) 제작, 지혈법, 붕대법 등을 시행하였다.

18세기에 있어서 독일에서는 Lorenz Heister(1682 ∼1758)가 개구장애에 대한 개구기(開口器)의 고안 등 구강악안면외과적 질환의 연구에 대하여 많은 공헌을 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Pierre Fauchard(1690∼1762)는 치과의술을 체계화하여 구강악안면외과학 발전에 기여한 바 크다.

영국에 있어서도 외과의술이 직업으로서 확립되었고 프랑스(Academie Royals do Chirurgie, 1731), 오스트리아(Josephs Akademie, Wien 1785), 독일(Collegium Medico Chirurgicum, Berlin 1795)등에서도 외과전문 병원이나 외과학회가 창설되어 구강악안면외과학도 외과의 한 영역으로서 진보를 거듭하였다.

 

19세기 후반에는 미국에서도 의학교로부터 독립하여 1839년 Baltimore 齒學校 (Baltimore College of Dental Surgery)가 세계에서 처음으로 창설되었으며 미국치과의사회(American Dental Association)) 1859년에 창립되었다. 또한 미국의 Long(1842), Well(1844), Morton (1846), Simpson(1847)에 의한 흡입전신마취법에 의한 무통적 조작이 개발되었다. 그 외 방부소독법(Lister Semmelweis), 무균법(Schimmelbusch), 지혈법(Esmarch) 개발 등은 구강악안면외과의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20세기에 와서 화학요법의 개발(Domagk 1932, Fleming 1929)등과 그후 각종 항생물질이 개발, 마취학의 진보, laser외과와 냉동외과(cryosurgery)등의 출현은 구강악안면외과 영역의 관혈적 수술기법의 확대에 공헌한 바 크다.

 
 
 
우리나라 고대조선의 의술은 중국의학의 유입과 신라시대의 불교문화의 전래에 따른 인도의설(醫說)의 수입에 의한 것이다. 즉 고조선 및 삼국시대의 문헌이나 유물에서 발치의 흔적은 발견할 수 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고려시대는 의료체계가 제도화되어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담당하는 의사를 교육하는 교육기관과 의사자격을 검정하는 고시제도를 통하여 의사를 배출하였으며 몇 가지 종류의 의서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의 의서인 향약구급방(鄕藥救急方)에는 치병(齒病), 치주질환 (齒周疾患), 구강질환(口腔疾患)등의 치료법과 예방법 등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조선 초기에는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하여 의사제도는 고려 때와 그 명칭을 달리하였으며 구강과 라는 분과나 특수교육은 없었던 것 같다. 조선조 후기 에도 전기와 같이 별 진전은 없었으나 동의보감 등에 치아 및 구강질환의 새로운 예방 및 치료법에 관한 기록은 있다. 그러나 의서나 비의서간에도 수술이라던가 발치 등에 대한 관혈적 처치방법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개화기인 조선조 말에 미국의사이며 선교사인 Horace N. Allen ( A. D. 1884)이 처음으로 발치기구를 사용하여 발치시술을 시행하였다. Allen(1885년 4월부터 1886년 4월까지)의 보고에서 충치 60례, 구내염 55례, 발치 15례, 악골골절, 구순파열, 중설(重舌) 및 교합의 수술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1893년 일본인 치과의사 野田應治가 제물포에서 처 음으로 치과의원을 개설하여 새로운 직종으로 등장하였고, H. Slade(MD, DDS), J. Souers(DDS), D.E. Hahn등이 치과의료에 종사하였다. 한편 제중원(1085), 광제원(궁내부의원 1900), 세브란스 병원(1904)등 종합병원과 1899년 국고지원으로 의학교 가 설립되었으나 치과가 분과로 독립되지는 못했다. 1900년 한성의원에 치과를 두어 일본인 치과의사인으로 重城養二(1904)가 초대과장으로 취임하였고, 1909년 11 월 대한의원(후에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명)에도 치과 진료과목이 분리되었다.

1915년 일본치과의전 출신인 함석태가 우리 나라 최초의 치과의사로서 서울 중구 삼각동에 개업하 여 구강외과 전문과목을 표방하여 환자를 진료하였고 한동찬(1917), 이희창(1921)등이 구강 외과환자를 진료하였다. 1921년 세브란스병원에 미국선교 치과의사인 J.L. Boots와 J.A. McAnlis가 치과에 부임하여 구강외과환자를 진료하였다. 1922년 우리 나라 최초의 치과학교인 경성치과의학교(3년제)가 설립되어(1929년 전문학교로 승격됐다), 동 부속병원 구강외과에 西山莘男( 日本 大阪齒졸)이 교수로 취임하고 수년후 垣見庸三이 주임 교수로 취임하여 많은 일본인과 이춘근교수를 위시하여 여러 한국인 교실원들이 구강외과교육과 진료에 종사하였다.

 
 

또한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齒科學 교실에는 최초로 生田信保(Ikuda)교수와 경성의학전문학교 齒科學교실에는 Hirose교수와 일본동경의과학교에서 구강외과를 수련한 박용덕 교수가 세브란스병원에서 구강외과환자를 진료 하였다. 해방후 1946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는 이춘근, 오재인, 김용관등이 구강외과학 교육에 참여하였고 1952년 4월에 대학원 석사과정 이, 1960년에는 박사과정이 개설되었으며 1956년 3월 처음으로 두사람의 치의학석사(구강외과학 전공)가 탄생하였다. .

1959년 1월 대통령령 제1430호로 국립대학교 설치령이 개정되어 동년 4월에 치의예과가 개설되어 의과대학과 같이 치과대학도 6년제 교육제도로 발전되었다. 1959년 6월 대한구강외과학회의 창립, 1960년 38선 치과학회 탄생, 1962년 11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가 창립되었으며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후 미국군의관(C.C.Alling, R.S.Shira, D.E.Cooksey등) 과 일본인 교수등이 내한하여 대학과 학회의 학술대회를 통하여 선진국과의 교류를 통한 친목도모는 물론 학술교류증진에 커다란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고 조국동란과 월남파병등은 많은 악안면외과 환자들을 접할 수 있었던 기회였기에 이역시 구강안면외과학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생각된다.

1970년도에는 치과대학 교수요강과 대학설치 기준령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게 되어, 3개 치과대학 학장단 회의에서 여러 차례 회의를 거듭하여 구강외과 교수요강을 제정하여 이를 학생교육에 적용토록 하였다. 1987년 9월 대한 구강악안면외과학회 산하의 10개 치과대학 구강악안면외과교수로 구성된 교과과정위원회는 여러 차례 워크숍을 통하여 우리 나라 구강악안면외과학의 교육표준화를 위해, G.O. Kruger의 [Text-book of Oral and Maxillofacial Surgery 6th Edition 1984. The C.V. Mosby Company]의 한글번역판을 교과서로 편찬하여 학생교육에 많은 도움을 되었다.

1959년 6월에 대한구강외과학회가 탄생되고 그 명칭도 1984년에 대한구강-악안면외과학회, 1994년 대한구강악안면외과학회로 개칭되었고, 1975년에 학회지가 창간되어 그 명칭도 함께 변경되었다. 현재 계간지(년4회)로 많은 임상 및 기초연구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1962년 11월에는 대한 악안면성형외과학회가 창설되었고 1989년 그 명칭도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로 개칭되고 1978년에 학회지를 처음 발간하여 현재까지 많은 학술논문이 발표되고있다 1991년 10월부터 치과계 최초로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에서 인정의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